이제는 어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도 아직 박준 시인은 이제 고작이라는 나이가 어울립니다. 그런데 시를 보면 낡은 사진첩을 넘겨보듯 아득한 먼지가 느껴집니다. 그간의 시간들을 허투루 보지 않은 시인의 시선이 손 때 묻은 세월을 담았나 봅니다. 오늘은 시인 박준의 아름다운 시를 같이 즐겨 보려 합니다.
맥박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답장을 쓰다 말고
눅눅한 구들에
불을 넣는다
겨울이 아니어도
사람이 혼자 사는 집에는
밤이 이르고
덜 마른
느릅나무의 불길은
유난히 푸르다
그 불에 솥을 올려
물을 끓인다
내 이름을 불러주던
당신의 연음 같은 것들도
뚝뚝
뜯어 넣는다
나무를 더 넣지 않아도
여전히 연하고 무른 것들이
먼저 떠올랐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이틀 내내 비가 왔다
미인은 김치를 자르던 가위를 씻어
귀를 뒤덮은 내 이야기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발밑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꼭 오래전 누군가에게 받은 용서 같았다
이발소에 처음 취직했더니
머리카락을 날리지 않고
바닥을 쓸어내는 것만 배웠다는
친구의 말도 떠올랐다
미인은 내가 졸음을
그냥 지켜만 보는 것이 불만이었다
나는 미인이 새로 그리고 있는
유화 속에 어둡고 캄캄한 것들의
태가 자라는 것 같아 불만이었다
그날 우리는 책 속의 글자를
바꿔 읽는 놀이를 하다 잠이 들었다
미인도 나도
흔들리는 마음들에게
빌려온 것이 적지 않아 보였다
살아 있을 때 피를 빼지 않은 민어의 살은 붉다 살아생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 아버지가 혼자 살던 파주 집, 어느 겨
울날 연락도 없이 그 집을 찾아가면 얼굴이 붉은 아버지가
목울대를 씰룩 여가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시를 받아 쓰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 올라오기도 하였습니다. 표현할 수 없는 것, 닿을 수 없는 그림자 같은 마음에 잠시나마 닿아 본 것도 같아 마음이 너울집니다. 찬 겨울밤, 이 시를 읽은 누군가가 마음이 푸근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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